|
|
삼천리 제4권 제9호 (1932년 9월 1일.음) - 김마리아양 회견기,
오늘은 참으로 덥다. 바깥은 아마 백도 가까운 더위인가 보다, 화분에 심었던 백일홍도 기운을 잃고 쓰러졌고 금붕어 담은 어항의 물도 끓어오를 것 같다. 이날 서울 종로 백합원의 아래층 광장에서 나는 김마리아양을 만났다. 7월 20일날 아메리카로부터 서울에 도착한 뒤 같은 동창인 정신여학교 측의 초대연으로 한강 선유에 잠깐 참여한 뒤 되도록 외인과 접견하기를 피하여서 신귀국의 양은 이 날도 없는 시간을 자내어 우리와 식탁을 함께 하고 그립던 고토에 대한 정회를 실마리 풀 듯 풀고 앉으셨다. 양은 늙었다. 그 때 애국부인단 단장으로 반도의 상하를 울릴 때는 인생의 꽃이라 할 스물 여섯의 묘령 처녀이더니 지금 이 자리에서 보매 10년을 아메리카에 가 있는 동안에 양도 늙었었다. 그렇게 어여뿌던 대리석 같은 얼굴의 살빛도 아침 저녁으로 고국을 사모하는 찬 눈물에 서러웠음이던가. 다소 타셨고 세상 일을 근심하느라고 끼인 듯한 가느다란 주름살이 두어줄 약간 흘렀다. 그러나 그 대신 양의 기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듯 그 검은 두 눈썹과 정기에 끓는 그 눈빛은 옛날의 양과 같은 결심, 일대의 여장부에게서만 볼 수 있는 정수에 찼었다. 양은 금년이 서른 여덟이라고 한다. 그동안 지난 이야기를 물으니 비록 기미년 이후 법률상 10년의 시효는 지났었다 할지라도 아직도 망명시대의 쓰디쓴 경험과 주위의 사정 때문에 활발하게 입을 열기를 주저한다. ‘미국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어요.’ ‘여름 방학이 오면 미국 각지로 가끔 돌아다니면서 같은 동포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는 것이 대단히 유쾌하였습니다.’ 하는 몇 마디 말씀 외에 별로 두드러진 말씀을 아니한다. ‘장차 무얼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아직 보아야 알겠습니다만은 대개 원산 방면에 몇 해 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양은 그 뒤에 알고 보니 원산 여자 성경학원에 이르러 신학과 철학에 대한 교푠을 잡게 되었었다. 그래서 평양에 다니러 갔다가 아마 이 글이 세상에 발표되는 때쯤은 산수수명하고 갈매기 나는 명사십리의 저 동해 원산 항구에 이르러 분필가루를 드시고 계실 것이다. 양은 아직도 양장을 하고 있었다. 미국 건너간 뒤 십 수년 만에 외국에서 조선옷을 입을 수 없어서 양장으로 생활한 관계이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도 씨는 양장을 하셨다. 양은 아직도 독신이시다. ‘결혼을 아니 하시렵니까?’ 하는 염치 없는 질문에 양은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오직 미소할 뿐이다. 그렇게 쾌활한 분도 결혼 문제에 이르러는 수줍음을 먹는다. 이제는 양의 고토를 탈출하던 때 이야기를 적기로 하자. 지금부터 13년 전 기미년에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릴 때 동경의 학창에서 진리를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양은 동지 황애시덕씨와 함께 손을 맞잡고 서울로 돌아와서 정신여자학교를 근거 삼고 신의경, 백신영, 황해시덕, 이정숙, 장선희, 이혜경, 김영순 등 여러 여성과 함께 여성의 민족운동단체로 애국부인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지방의 유수한 여류 운동가와 연락을 맺는 한편에 적십자사도 결성하여 장차 많은 활약을 보이려 하였다. 그러다가 사일미거에 발견되어 그 해 9월에 대구 경찰부의 손에 체포되어 이래 검사정과 철창에 얽매인 몸이 되었다가 결국 3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신병 때문에 보석되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이 때의 일은 기자 유광열씨가 당시 동아일보에 ‘김마리아양 병상방문기’를 발표한 일이 있어 기억이 좋은 분은 아직도 그 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다가 양은 아무도 모르게 미국에 건너갈 결심을 품고 어느날 저녁 가는 비가 내리는 속을 인력차에 호로를 내리어 감회 깊은 서울을 떠났다. 그의 족적은 다시 인천을 거치어 위해위를 거치어 상해를 지나 미국에 갔던 것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경사의 눈을 피하여 운외만리의 외국으로 따라가던 그 때의 양의 고통은 상상이외이리라. 양은 이렇게 망명하던 때의 경로를 이야기하고는 적적한 웃음을 짓는다. 들은 즉 양의 이번 귀국에는 배재학교장과 기타 여러 서양인사들의 진력이 많았다고 전한다. 어쨌든 많은 기대를 반도 인사에게 품게 하던 걸출한세 여류인재이든 박인덕씨와 황애시덕씨 이제 마저 한 분 남았던 김마리아양까지 귀토하였다. 김마리아양은 장차 어느 길로 걸으려는가? 어느 덧 서창에는 저녁해가 걸렸다. 천정의 선풍기는 흥분되어 식탁에 앉은 주객의 얼굴을 시원스럽게 스친다. 나는 양과 재회를 약속하고 갈라서 나오니 벌써 종로청년회관에는 전등이 켜지고 있었다. |
| 
|
